2012년 10월 2일 화요일

행복지수 공식.



내가 아버지를 존경하는 이유는 단순히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셔서는 아니야.
아버지는 항상 나에게 좋은 말씀들을 많이 해주셨어.
잘못했을때 매 보다는 따끔한 이야기들을 많이 해주셨어.
물론 어릴때 골프채로도 맞아봤지만.. ㅋㅋㅋ

추석날 아버지와 아들 섭이와 아내 넷이서 강화도 할머니댁 근처 저수지를 걷고 있었어.
그때도 억새풀과 갈대의 차이점을 알려주고 계셨어.
많은 사람들이 억새풀과 갈대를 혼동한다며 그 차이점을 알려주셨지. ㅋㅋ
그리고 분명 작년에는 바짝 말라있던 저수지에 물이 다시 차고 
물고기들은 어디서 다시 생겼는지도 알려주셨어.

아버지는 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셨는데 
자연에도 엄청 지식이 풍부하셔.
개인적으로 아버지가 경제학을 공부하지 않으셨다면 자연과 함께하셨을거 같아..

아무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수지 한곳에 멈춰서서 이런 얘길 해주셨어.
지금 나에게 너무나 절실했던 이야기였지..

아버지가 경제학공부를 할 당시 재밌게도 
행복지수에 대해서도 경제학과에서 가르치더라고...

행복이란 우리가 소유한것을 욕망으로 나눈것이라고 하셨어.
더 많이 소유하고 욕망이 적을 수록 행복한것 이고,
더 적게 소유하더라도 욕망이 그 보다 적다면 또 한 행복이라고.

너무 아둥바둥 살아가지 말라고 하셨지.
마음 여유롭게 먹고 천천히 하나씩 해나가라고.
적당한 인생의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이뤄내기 위해 달려가라.
하지만 그 목표를 위해 너무 욕심을 부리다 보면 불행해 질 수 있다.
너무 무리한 큰 목표도 불행해 질 수 있다..
뭐 이런 이야기 였어.

정말 지금 나에게 너무나도 필요한 이야기 였거든...
아버지도 나와 같은 때가 있었고, 
아버지는 지금 이 이야기를 해줘야 할 적당한 때라고 느끼셨을꺼야.
정말 현명하신 분이시지. 
이 이야기를 2-3년전에 들었다고 해도 난 전혀 공감못했을거야.
아마 그냥 잊어 버렸겠지..
적확히 어떤 이야기를 정확히 어떨때 해야할 지 알고 계셨어.
마치 내 인생을 도표로 그려두시고 할 이야기들을 표로 만들어 놓으신것 같아.
내가 아버지를 존경하는 이유는 이거야.
아무튼...

결혼을 하면 남자는 부담감이 조금 생겨.
절대 나쁜건 아니지만 남자로서,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책임감도 많이 생기고 그 과정에서 욕망이 커지거든.
그리고 그 지나친 욕망, 욕심앞에서 한없이 작은 나를 발견할때면 자괴감에 빠지기도해.
나보다 더 가진 삶을 보며 '질투'하기도 하고..

아버지께서 경제학을 공부하실 때 들었던 내용을 찾았어.
그래서 주위사람들과 공유하려고해.
아래 글을 읽고 조금이라도 행복해 질 수 있다면 좋겠어.

나도 더 행복해 지고 싶어.
나, 내 가족, 내 주위 사람들 모두에게 다시 건강한 사람으로 돌아오고 싶어.
더 건강한 신동열.
더 건강한 바스코.

-GUERRILLA MUZIK-


행복지수 공식◇

우리가 살면서
더 많은 돈을 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보다 풍족한 생활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풍족한 생활을 원하는 것일까? 만약 거지가 백만장자보다
더 행복하다면, 우리가 부러워해야 할 대상은 거지일까, 백만장자일까?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Paul A. Samuelson)은
다음과 같이 간단한 방정식으로 행복을 정의했다.

행복(幸福) = 소유(所有) / 욕망(慾望)

즉 행복을 결정하는 두 가지 요소가
소유와 욕망인 것이며, 욕망이 정해져 있을 경우
소유가 커질수록 행복해 진다. 반대로 소유가 정해져 있다면 욕망이 적을수록 행복해 진다.
다시 말해 소유가 클수록, 욕망이 적을수록 행복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행복의
최대화는 곧 소유의 최대화이며, 소유의 최대화는 수입의 최대화와 같다.
그러나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소유할 수 있는 재물에는 한계가 있다.
먹고사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고 수입도 풍족한 사람이 행복하지
않다면, 이는 욕망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소유는 유한(有限)하고 욕망은 무한(無限)하기에 행복(幸福)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정(眞正)한 행복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지금의 삶에 만족(滿足)하고, 자기(自己)생(生)을 충분(充分)히 누리며,
현재(現在)를 소중(所重)히 여길 줄 아는 사람만이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결국 행복지수의 궁극적(窮極的)인 수치(數値)는
소유(所有)와 욕망(慾望)의 줄타기를 짜릿하게 즐길 수 있는
마음의 여유(餘裕)에서 결정(決定)되는 것이다.
-'마음의 암호에는 단서가 있다.
모차오' 중에서-

2012년 9월 28일 금요일

즐거운 한가위!

모두 즐거운 추석!
잘 보내고 조만간 봅시다!

요즘 작업때문에 바빠서 블로그를 자주 못했지만..
자주 올리도록 노력할께.

재밌는게 좀 있을꺼야. 내 앨범은 아니지만..
내가 총괄해서 제작하는 재밌는 프로젝트가 나올거야.
내 앨범도 물론 준비 중이고.

바쁘게 열심히 해서 재밌는걸 빨리 들고 나올꼐.

좀만 기다려!

즐추!
ONE!

언더그라운드 (2) - 멘토

언더그라운드에 데뷔하고
신촌 라이브클럽에서 6개월도 활동했는데, 클럽이 문을 닫아 버렸어.
장사가 안됐나봐. 이유가 어찌됬든지 나머지 뮤지션들은 갈 곳을 잃은거야..
그때 당시 Master Plan이라는 언더그라운드 공연장이 있었는데
그곳은 다들 아시다 시피 힙합의 성지라고 불리는 곳이었고 아무나 무대에 설 수 없는 곳이었어.
실력이 뛰어난 뮤지션만 슬스 있었지..
그때 당시 내 팀은 데뷔한지 6개월 밖에 안됐고 실력도 형편 없었어.
그래서 Master Plan은 꿈도 못꾸고 다른 클럽을 알아봤어.

그때 찾은 클럽이 '슬러거'라는 클럽이었어.
홍대에 수노래방 사거리 근처에 작은 파출소 있지?
거기 바로 옆에 지하 클럽이 슬러거자리였어. 지금은 없어 졌지만..
아무튼 슬러거는 힙합공연장은 아니었고 작은 락,밴드 뮤지션들이 공연하는 자리였고,
장사가 잘 안됐는지 힙합공연도 시작하더라고.
그래서 거기서 오디션을 보고 활동을 시작했지.

그때 당시 슬러거에 계시던 뮤지션들이 현재 스나이퍼형, 배치기, 그외 많은 스나이퍼 사운드 식구들이었어. 나도 있었고, 씨클로라는 팀, 대학연합등 많은 팀들이 있었어.
MC.K, 레드페이스라는 분들도 계셨고!

그때 대기실이 기억나.
들어가면 뮤지션들의 반가운 얼굴들과 알게 모르게 느껴지는 서로에 대한 경쟁심.
무대위에 올라가기 전에 그 흥분!
형들도 계셨고 동생들도 있었고, 공연이 끝나면 다같이 술을 마시러가곤 했어.
난 좀 술자리에 자주 안나갔던걸로 기억해.

근데 스나이퍼형이랑은 술을 자주 마셨던걸로 기억해.
스나이퍼형의 방배동 옥탑방작업실도 자주 갔었고.
그때 나에게 스나이퍼형은 신처럼 느껴졌어. 정말 최고였거든.
라이브도 최고였고 가사도 멘트도.. 그 카리스마가 후덜덜했었어..
형에게 많은 걸 배웠었어.

술에 만취하면 동생들을 자주 때리고 했어. 근데 그게 참 재밌었던게 상대를 좋아하는 표현을 그렇게 하셨거든. ㅋㅋ

형 좋아해? 그럼 한대 쳐봐!
에이.. 형을 어떻게 때려요 동생이..
마지못해 때리고나면 형은 나를 좋아하는 만큼 한대 쳤던걸로 기억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둘이 술먹고 홍대전철역에서 신문지 덮고 잔적도 있었어.ㅋㅋㅋ
굉장히 다이나믹한 시기였던거 같아..

음... 아무튼 난 초창기에 스나이퍼형이라는 굉장히 멋진 멘토를 만났었어.
그게 지금의 내가 존재하는데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해.

요즘은 스나이퍼형과 그렇게 자주 보지않고 연락을 자주 하지 않지만.
그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어.
자연스럽게 거리감이 생긴거 같아. 거리감이라 표현하기에는 뭐하지만..
그냥 자연스럽게 난 더 많은걸 배우고 싶었고, 스나이퍼형은 자연스럽게 더 다른 동생들이 더 잘 맞았을 수도 있고.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어.
만약 계속 서로 잘 지내고 있었다면 아마 지금 난 스나이퍼 사운드에 있었을 수 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해.

언더그라운드에 데뷔해서 공연을 하는것도 중요하지만 좋은 멘토를 만나는것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

슬러거 클럽은 내게 스나이퍼형을 만나게 해준 곳이야.
내가 1년넘게 몸담아 왔던 곳이었고.
신촌 라이브클럽, 홍대 슬러서 클럽. 이 두곳에서 한 2년동안 매주 공연만 했어.
매주. 2년동안 공연만 했어..

페이는 없지만 완전 다이나믹했었어.
아... 저때로 다시 돌아가면 재밌을거 같아..


2012년 9월 8일 토요일

이게 나의 불금..

아내랑 아들은 방에서 자고..
재다니엘과 콜라 그리고 도리토스!
한 주 수고했다~ 주말은 푹 쉬어야지..



추적...

와... 근데...
이거 블로그 들어온 사람이 어느국가에서 접속했는지랑,
핸드폰인지 컴퓨터인지도 알수 있는데,
안드로이드기반인지 아이폰인지, 블랙베리인지 다 알 수 있어..
좀 섬뜩하지 않어??

저정도 알수있으면... 알려고 맘먹으면 더 알 수 있지않을까...

아님 말고..


언더그라운드 (1) 데뷔 : 라이브 클럽


언더그라운드 씬 데뷔.

라이브클럽
2000년. 처음 신촌의 '라이브클럽' 무대에서 데뷔를 했던때가 기억나.
이미 라이브클럽의 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뮤지션분들 앞에서 우리가 준비해간 오디션용 MR을 틀고 오디션을 보던 때가. ㅋㅋㅋ

아.. 라이브클럽 이름이 라이브클럽이였어. ㅋㅋㅋ

당시 세종대학 재학 중이던 나와 다른 동기, 건국대생 2명 해서 4명이서 팀을 만들고,
지금 생각해보면 굉장히 허접한 자체 제작한 미디음악3곡을 오디션용으로 만들어서 연습을 했어.
오디션은 한번에 붙었지만 결코 우리가 잘해서 붙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지금 생각하면 사장도 어차피 클럽에 공연할 팀도 부족하고 어차피 손님도 없는데, 
공연 라인업이라도 늘리자 식으로 합격했던것 같아. 
물론 사장이 따로 우리에게 페이를 주지 않아도 됐으니 사장은 고민할 것도 없었고.
2000년 당시 신촌 라이브클럽에 관객은 2-3명. 많으면 5-10명.
요즘 홍대 언더그라운드 씬에 비하면 참...

요즘 어린 친구들 좋은줄 알라고~ 무슨 작은공연해도 적어도 50명이상은 와주시잖아!
그땐 티켓가격도 5천원에 음료수까지 드렸었어. 
그래도 10명이 안됬고 ㅋㅋㅋ

이때 활동 했던 언더그라운드 힙합 팀들이 많이는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씨클로, 대학연합팀 등이 기억에 나..

씨클로는 실력과 멋진 외모로 인기가 좀 있었던 팀으로 기억해...
근데 뭐 인기 있었다고 해봤자 관객이 2-3명이라....

아무튼 난 저곳에서 데뷔했어.
랩가사를 솔직히 어떻게 써야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정말 그냥 듣던 음악을 흉내내면서...
그리고 그냥 무대에 올랐어. 뭐 어떻게 손발을 써야하는지도 모르고, 발성이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진짜. 그냥 재밌기는 했었어.
지금 보다 훨씬 재미는 있었어..
그냥 모두에게 정답은 없었거든 그땐. ㅋㅋ 

M2메거진과 인터뷰

M2메거진과 인터뷰

인터뷰는 아래 사이트에 가시면 추가로 더 보실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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